전기차 개발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진행해온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시선이 어느덧 플라잉카에 집중되고 있다. 교통신호나 지형지물의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플라잉카는 전기차 제조로 쌓인 배터리 등 친환경 구동장치 노하우와 맞물리면서 미래 모빌리티의 핵심 분야로 떠올랐다.
■ 운송·물류업체 수요 폭증…뜨거운 개발 경쟁
플라잉카란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모빌리티 전반을 의미한다. 우버 같은 공유 모빌리티 또는 택시 호출 서비스와 아마존, 페덱스 같은 물류업체들이 운송 및 배송 전용 차량들을 플라잉카로 대체하려고 투자하면서 업체 개발 경쟁이 후끈 달아올랐다.
중국의 대표적인 전기차 스타트업 샤오펑(小鵬,XPENG)을 이끄는 허 샤오펑(45) 최고경영자는 지난해 9월 공식 석상에서 “가까운 미래 전기차를 넘어 플라잉카와 로봇을 내놓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특히 “1년 내로 플라잉카를 구체화해 공개하고 사전예약도 받는다는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허 샤오펑은 “전기차 제작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앞선 플라잉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자동차휠 대신 날개와 프로펠러를 부착한 샤오펑 전기 플라잉카가 조만간 세계 하늘을 누빌 것”이라고 자신했다.
샤오펑은 허 샤오펑 CEO의 공식 발표 2개월 전 플라잉카 X2의 프로토타입을 선보인 바 있다. 560㎏까지 적재 가능한 이 플라잉카는 시속 130㎞로 35분간 테스트 비행에 성공했다. 이후 연구개발팀을 보강한 샤오펑은 현재 수 백명의 인원을 플라잉카 개발에 투입한 상태다.
이전부터 플라잉카 개발 의사를 밝혀왔던 혼다는 샤오펑의 공식 발표 1개월 뒤 하이브리드 터빈 기술을 적용한 전기 수직이착륙기(eVTOL) ‘혼다 eVTOL’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하이브리드 가스 터빈과 전기 모터를 결합한 이 비행기는 미래 이동수단 중 하나인 플라잉카 개발을 시사해온 혼다가 정식 개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특히 스마트폰을 활용한 예약제 플라잉카로 운영될 전망이어서 일반의 관심도 뜨겁다. 이와 별도로 구급차량처럼 환자나 약품, 장기 긴급 운송용 항공기는 물론 화물 운반용으로도 활용될 전망이다.
이미 소형 여객기 ‘혼다 젯(Honda Jet)’을 제작했던 혼다는 배터리와 모터만으로는 비행거리가 한정되는 현존 전기 플라잉카에서 벗어나 하이브리드 전기 가스터빈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환경에 주는 부담은 덜면서 비행거리를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게 혼다 설명이다.
‘혼다 eVTOL’에는 혼다가 그간 영위했던 각종 사업부문의 노하우가 집약된다. 이에 대해 혼다는 “‘항공기 제트엔진에 사용했던 기술은 물론 F1 레이싱카 전용으로 개발한 초고회전 제너레이터, 자사 전기차에 탑재되는 배터리 등이 모두 활용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론 머스크(51)가 이끄는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까지 조만간 플라잉카를 개발하리라는 예측은 이미 나왔다.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7월 25일 공식 채널을 통해 테슬라가 하늘을 나는 자동차 개발에 나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관측했다. 특히 예상대로 테슬라가 플라잉카 업계에 뛰어들 경우 주가가 1000달러(약 115만원)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모건스탠리는 비슷한 시기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테슬라의 다음 사업이 플라잉카일 것으로 추측했다. 테슬라의 플라잉카 개발 가능성에 대해 모건스탠리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하늘을 나는 차를 개발하겠다는 의향을 언급한 적은 없다”면서도 “테슬라로서도 플라잉카는 자율주행이나 배터리 등 전기차 기술과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기차는 물론 민간 우주개발 업체 스페이스X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역시 플라잉카 시장의 무한한 가능성은 여러 차례 인정한 바 있다.
■기술적 한계 넘어라…계속되는 연구개발
하늘을 나는 플라잉카가 보완할 점은 많지만 가장 시급한 두 가지는 이동거리와 안전성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완성차 업체들은 배터리 및 낙하산 전문업체와 손잡고 솔루션 마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일본 에낙스다. 에낙스는 지난해 10월 중순 리튬이온배터리 음극 실리콘 비율을 최대 80%까지 늘린 라미네이트형 배터리 셀을 선보였다. 오직 플라잉카에 대응하는 이 리튬이온배터리는 음극에 사용하는 실리콘 비율을 일반 배터리의 2.5배까지 높였다.
일반적으로 리튬이온배터리는 실리콘 음극재가 많을수록 용량이 커진다. 에낙스가 개발한 배터리 셀의 실리콘 음극재 비율은 보통 리튬이온배터리(30%)를 훨씬 뛰어넘는 80%다.
배터리 속 실리콘은 충·방전 시 팽창·수축하는 성질이 있다. 실리콘 부피 때문에 전지의 용량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에낙스는 실리콘 활물질 구조를 고안해 압력과 함께 음극에 실리콘이 많이 포함돼도 팽창과 수축을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특히 플라잉카의 배터리 부하가 가장 심하게 걸리는 이·착륙을 위해 고출력 설계를 적용했다. 이 배터리의 중량 에너지 밀도(전지용량에 평균 방전 전압을 곱한 후 전지 전체 중량으로 나눈 값)는 1㎏ 당 280~300Wh이며 배터리 최대 충·방전 지표인 C레이트는 6으로 일반의 3~6배에 달한다.
올해 제품화를 목표로 개발 중인 이 배터리는 전기차 업체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존하는 리튬이온배터리 전기차들은 보통 완충 시 400㎞ 내외를 달릴 수 있다. 가장 오래 달리는 차량의 경우 주행거리가 1000㎞지만 엄청난 배터리를 사용해 차가 무겁고 가격도 비싸 플라잉카용 배터리가 전기차 업체에서도 인기다.
일본화약은 지난해 드론 전용 긴급 낙하산을 조만간 시장에 선보인다고 발표했다. 당시 회사는 “궁극적으로 전기 플라잉카에 승객용 낙하산을 도입하기 위해 기술개발을 진행 중”이라고 밝혀 주목받았다.
지난해 6월 일본 마쿠하리 메세에서 열린 ‘일본 드론 2021(Japan Drone 2021)’ 행사에서 첫 선을 보인 긴급 낙하산 시스템 ‘패러세이프(PARASAFE)’는 드론 고장 시 낙하 속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장치다.
이 낙하산은 총중량 25㎏의 드론에 대응한다. 일본 자율제어시스템연구소(ACSL) 규격에 맞춰 개발됐으며, 시중에서 판매되는 다양한 브랜드 제품에 대한 적용 테스트를 거쳐 지난해 12월 이미 시제품이 발매됐다.
패러세이프는 초고해상도 카메라와 렌즈, 모터 등 고가 부품을 장착한 드론이 뜻하지 않게 추락할 경우에 위력을 발휘한다. 드론은 갈수록 고가 장비를 탑재하는데 이를 보호할 장비가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현재 일본화약은 총중량 최대 100㎏까지 대응하는 다양한 페러세이프를 개발 중이다.
특히 일본화약은 총중량 500㎏ 이상까지 버티는 중대형 패러세이프 T2 콘셉트를 당시 행사에 공개했다. 회사 관계자는 “여러 완성차 업체가 개발하는 전기 플라잉카에 대응하기 위해 낙하산이 버티는 중량을 더 늘릴 계획”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공중을 비행하는 드론이나 플라잉카는 지상과 전혀 다른 환경을 극복해야 한다”며 “돌풍이나 배터리 소모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기체가 떨어질 수 있는데, 큰 파손이 불가피하므로 낙하산은 필수품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날개 접으면 전기차로, 다양한 콘셉트 눈길
일반적으로 현재 개발되는 플라잉카는 드론의 확대형이다. 즉 4개 축에 거대한 프로펠러를 부착해 이 동력으로 하늘을 난다. 다만 이런 일관적인 디자인이나 동력 구조를 거부한 ‘별종’들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샤오펑의 ‘HT Aero’는 접이식 로터를 장착한 2인승 경량 플라잉카다. 도로를 달릴 때는 로터를 수납했다가 비행할 때는 다시 로터를 확장하는 구조를 가졌다. 하늘을 나는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해 낙하산을 장비했고 출근이나 통학 등 개인적인 이동에 맞춰 최대 비행 가능 시간을 35분으로 설정했다.
일본 플라잉카 스타트업 테트라가 지난해 여름 공개한 전기 플라잉카 ‘Mk-5’는 수직이착륙기 스타일이다. 13.5kWh 배터리를 사용해 약 150㎞ 비행이 가능하다. 총중량은 488㎏이며 80㎏가량 체중의 승객 1명이 탑승할 수 있는 개인용 플라잉카다.
고정된 날개에 로터를 32개나 장착한 ‘Mk-5’는 수직으로 이륙하고 수평 방향으로 비행한다. 로터 32개 중 4개가 망가져도 안정적인 이착륙이 가능하다. 수평 방향 비행은 꼬리날개에 자리한 로터 1개가 담당한다.
미국 부유층을 겨냥해 제작된 ‘Mk-5’는 40기 정도의 예약까지 받은 상황이다. 연구개발을 거쳐 늦어도 내년부터는 소비자에게 인도될 예정이다. 설계는 일본에서, 연구개발 및 생산은 미국에서 이뤄진다.
[김세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