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호 Vol.13

[창간호] 이영만의 휴먼 오딧세이-9수의 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커버스토리 2022-05-16 11:31 이영만 기자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쓸모없는 세월은 없다.

아픈 상처도 그냥 보낸 시간도 세월이 흐르면 나를 키우는 힘이 된다. 세월은 아무 생각 없이 흐르는 게 아니고 어딘가에 꼭꼭 쌓여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어느 잘난 정치인이 한마디 했다.

“9수가 뭐야. 난 한 번에 붙었는데...”

그는 그 말을 하면서 파안대소했다. 아홉 번이나 시험을 쳐 겨우 붙은 것에 대한 비아냥이지만 그가 모르는 게 있다. 좌절과 아픔의 세월이 얼마나 강한지
.

그냥 그런 시험, 떨어져도 그만인 시험이라도 떨어지면 가슴이 아프다. 자괴감이 들고 남 보기도 민망하다. 많은 사람이 쳐다보고 있으면 더 하다. 원인을 분석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된다.

처음은 그러려니 하지만 막상 떨어진 사람은 결코 ‘그러려니’가 되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떨어지면 덜떨어진 사람처럼 보인다. 주위 사람들이 말리기 시작한다.

‘그것만이 길이 아니다. 다른 좋은 길도 많다.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맞는 말이다.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자신 있다. 붙을 것이니 포기할 일은 아니다.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그래도 가슴 한 켠은 허전하다.

마음을 더욱 다잡는다. 뭐가 문제인지를 되새김한다. 떨어질 리가 없는데 떨어지니 이래저래 불쾌하다. 운이 없었다고 치부한다.

속은 멍투성이라도 겉은 유유자적이다. 의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후배들의 합격 턱 자리에 서슴없이 찾아가 진심 어린 덕담을 건넸다. 합격한 후배의 격려는 위로가 아니다. 아픈 곳을 더 아프게 하는 송곳이다.

이제 운 타령도 할 수 없다. 다섯 번, 여섯 번이면 정말 치열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야 한다.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주위의 작은 수군거림이 아우성처럼 크게 들린다.

그럴수록 기세당당이다.

결혼을 앞둔 친구의 함진애비로 지방에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부한다고 골방에 처박혀 있으면 그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만날 수 없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진해서 앞장선다.

친구 아버지의 장례를 못 본 척 하지 않았다. 시험은 다음에도 있지만 고인을 보는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다. 먼 길 마다않고 장지까지 갔다.

허세, 아주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방황의 시간들, 그래도 사람답게 살았다

술이 좋고 사람이 좋다. 함께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어느 해의 형사소송법 시험이었다. 마지막 과목이어서 일찍 털고 나왔다. 20여분의 시간이 더 있었지만, 충분히 답을 썼다. 끝나고 족발집에서 만나 한 잔 기울이자던 약속이 어른거려 다시 살펴보고 싶지 않았다.

과락이었다. 0.04 점이 모자랐다. 남은 시간에 한 번 더 봤으면 됐을까.

어느 해엔 지방에서 올라 온 고시 친구를 도와주느라 자기 시간을 쪼개기도 했다.

일곱 번째도 떨어졌고 여덟 번째도 떨어졌다. 습관이 되어 버린 낙방. 체념이 될까. 그건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습관이 되거나 체념 상태가 되지 않는다.

상고를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하다가 막노동을 하며 공부할 돈을 모으고 군대에 가서 수년을 보낸 사람도 붙은 시간이다.

서울 법대에 거뜬히 들어갔고 무탈하게 졸업하고 군에도 가지 않고 대학원까지 다니며 시험을 쳤던 사람에겐 지독히도 긴 시간이었다.

보통 그런 경우 십중팔구 포기다. 주위에서도 가만두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또 했다.

9수. 잔인한 세월이지만 그 세월 속에서 그는 마음을 단단히 하고 사람을 모으고 인생을 배우고 돌아가는 길을 배웠다. 뚝심, 강단, 포기를 모르는 정신을 모두 그때 가슴속에 담았다.

떨어질 때마다 붙을 때를 생각했다. 시험의 뜻을 이루면 세상을 바로 잡아야지 했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지 했다.

잔인한 세월이 아니라 연마의 세월이고 단련의 세월이고 기회의 세월이었다.

어쩌면 그때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는 각오도 여러 번 되새겼을지도 모른다.

1991년 ‘고시 장수생’ 윤석열이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차뿐만 아니라 2차까지 붙었다.

전설 같은 일화가 있지만 그건 믿거나 말거나다. 2차 시험을 사흘 앞두고 대구에 갔다. 함잡이였다. 신나게 놀고 마시다가 서울행 버스를 탔다. 시험 걱정이 되살아났다. 형사소송법 책을 꺼내 들었다. 그때 읽은 한 대목이 그대로 시험에 나왔다.

어떤 이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워낙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해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마음 단단히 먹자 바로 붙었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어쨌든 떨어진 건 떨어진 것이고 9수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8전 9기. 아홉 번 만에 붙은 것 보다 아홉 번이나 시험을 쳤다는 게 더 대단한 일이 아닐까.

세월이 흘렀다. 2019년 7월 제43대 검찰총장이 되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풍상이 없지는 않았다.

1999년 박희원 경찰청 정보국장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김대중 정부의 경찰 실세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강골 이미지는 심었지만 ‘승진은 물 건너갔다’는 평들이 나돌았다.

2002년 법복을 벗었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이 ‘이용호 게이트’에 휘말려 사퇴, 어수선할 때였다. 1년여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런데 영 아니었다. 돌아왔다.

2003년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지휘하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사팀에 합류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강금원 전 창신섬유 회장을 구속기소 했다.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에선 정몽구 회장을 끝내 구속했다.

2013년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았다. 국정원 직원 체포를 강행하다 수사팀에서 배제되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국정감사장에서의 그의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훗날을 모르는 조국 서울대 교수는 ‘두고두고 내 마음에 남을 것 같다’며 응원했다.

하지만 참기 힘든 추운 겨울이 시작되었다. 정직 1개월, 그리고 이듬해 정기인사에서 대구고검으로 발령 났다.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이 대구고검 평검사가 되었다. 좌천이고 유배였다. 계급장을 뗀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만 떠나라는 신호였다.

2016년 대전고검으로 옮겼다. 여전히 겨울이었다. 사표를 낼까도 생각했지만, 그 옛날을 떠올리며 참고 또 참았다.

그 해 말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다. 박영수 특검이 그를 호출했다. 한겨울 얼음판에서 벗어났다. 박영수 특검과 윤석열 수사팀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징역 45년을 구형했다.

대중들이 그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정의를 실현하는 ‘저승사자’가 나타났다며 박수를 보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저승사자’. 대중 속으로...

2017년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이 되었다. ‘이제 검사는 틀렸다’고 했던 그 윤석열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기소 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가에게 430억원 상당의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기소 했다.

검찰총장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고 험난했다. 8번 떨어지면서 켜켜이 쌓아놓은 뚝심과 정의감이 없었다면 가지 못할 길이었다. 기수를 무시한 인사였지만 검찰도, 정치권도, 국민들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만시지탄이라고들 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대처하라는 말과 함께.

그때가 7월 25일이었다. 그리고 보름쯤 후 ‘살아있는 권력’인 조국 법무부 장관 일가의 사건이 터져 나왔다. 윤석열은 법대로 했다. 일반인에게 보다 더 강한 잣대를 들이댔다.

조국 장관이 임명 2개월여만에 사퇴했다. 추미애가 장관의 바톤을 이어받았다. 윤석열 죽이기가 시작되었다. 추미애 장관은 수사권 지휘 발동과 검찰총장 직무 정지 및 징계로 그를 옥좼지만 그는 늘 그랬듯 기죽지 않았다. 싸울 건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원칙이었다.

일찍이 구경하지 못한 싸움. 장관은 의기양양했지만 그건 또 다른 몰락의 시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처 알지 못했으나 그건 새로운 기세의 시작이었다.

2021년 3월 4일, 사퇴했다. 그 사이 국민들이 그를 불같이 지지했다. 한 구석 찜찜 한 게 있었지만 밀어붙였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바람이었으나 일단 대선 가도에 안착했다. 대선 지지율 1위였다.

6월 대선 도전을 공식화하며 ‘국민의 힘’에 입당했다. 그리고 11월 5일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 신인’이 대선 출마 경력의 홍준표를 물리치고 일약 국민의 힘 대선 후보로 뽑혔다.

그리고 4개월여 후인 3월 10일 대한민국 제 20대 대통령으로 뽑혔다.

누군가는 단번에 붙은 사법시험 한 번 붙는데 9년여의 세월을 보냈는데 대통령은 9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누군가는 아직 시작도 못 한 일이다.

물론 운이 엄청나게 따랐고 운명이 신명 나게 밀어주었다.

전직 대통령과 현 대통령 그리고 정권 실세 장관들이 돌아가며 그를 지원했다. 키워주기가 아니라 죽이기였지만 반사이익이라 더 강했다.

정권 교체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 지금껏 두 번은 했는데 이번엔 한 번으로 끝났다.

정권 교체 열망을 떠안을 선수도 없었다. 누가 나가도 민주당 후보에 지는 판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상대 진영에서 그를 이쪽 진영의 후보로 내세웠다. 받아먹기 좋도록.

하지만 다 운은 아니다. 운이 와도 그 운을 잡을 힘이 없으면 안 된다. 잘 맞지 않는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을 밀쳐내고 젊은 이준석 대표를 끌어안고 안철수 국민의 당 대선 후보를 사퇴시킨 것 등은 어찌 되었든 그의 작품이다.

거친 듯 거치지 않고 허술한 듯하지만 마냥 허술하지 않고 때로 과감하고 빠르게 결단을 내린 덕분이다.

아쉬움은 있다. 정권교체의 열망을 다 담지 못했다. 기대치도 그리 높지 않다. 문재인 정부의 연장은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표를 찍었지만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마음들이 남아있는 듯하다.

기대치도 낮고 신뢰도도 떨어진다. 걱정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아팠던 상처가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가파른 대선 길에서의 엉성한 실수들이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 대통령직은 그의 말대로 혼자서 다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재수 대통령이라고 해서 다 잘한 것은 아니다. 모자라기에 진심으로 채워주고 싶은 순수한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득이 되지 않겠는가.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래도 한가지.

상처는 오래 지나면 낫지만, 상흔은 남는다. 그 상흔들이 가는 길에 부딪히는 작은 돌부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영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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