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부분에 터지는 절창.
흠뻑 젖어 비 내리는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픔이지만 그냥 아픔이 아니고 슬프지만 마냥 슬프지는 않다.
한없이 적시는 내눈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봄비가 내리네/ 아아아아아
그가 부르는 봄비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거칠고 탁한데도 소리가 맑다.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준 님. 망설이는 사이에 영원히 먼 곳으로 가버렸구나.
소리인데 그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후회 가득인데 아름다운 ‘님은 먼곳에’다.
마흔 여섯의 어느 봄날 장사익은 처음 자신의 소리를 내질렀다.
1994년의 어느 봄 날이었지 싶습니다. 장사익씨가 신문사로 덜컥 찾아왔습니다. 그런 숫기가 없는 사람인데...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특유의 겸연쩍은 모습으로 카세트 테이프를 한 보따리 내 놓았습니다.
“정말로 취입 한 번 해봤는데...”
무슨 소리지. 아차 싶었습니다. 두어달 전 이었습니다. 그날도 우리는 뭉쳤고 늘 그랬듯이 얼큰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속이 시원해 졌습니다. 느닷없이 아픔이 다가왔습니다. 아, 이 소리. 눈가가 촉촉해 졌습니다.
우리만 듣기엔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가 마음껏 내지르는 소리가 대한민국의 수많은 아픈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으면 싶었습니다.
불쑥 한 마디 던졌습니다.
“장선생, 그러지 말고 음반 한 번 내 보죠.”
“아니, 이 나이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말고...”
“아니, 마흔 넘어서 취입하면 누가 잡아 간답니까.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보시죠.”
진심이었습니다. 이구동성이었습니다. 우리 멤버 10여명도 모두 거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우리만 듣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렇게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정한 듯 했습니다. 그리곤 식전 댓바람에 여러 소리를 질러 음반을 냈다고 했습니다. 김동창씨의 피아노를 따라 단 한번에 녹음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찔레꽃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이 터졌다. 가슴을 파고드는 가슴의 소리
거친듯하면서도 맑고 깊은 소리. 한이 쌓이고 쌓이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않을 ‘찔레꽃’이었다. 한바탕 불러 제끼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던 알 수 없는 그 뭔가가 끈임없이 끓어오르는데...
목청 껏 내 뱉은 심연의 소리. 그냥 홀에서 남의 노래를 들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국보급 소리인데 그냥 내팽개칠 수는 없는 일이죠.
‘홍보를 제대로 해보자. 아는 기자도 나 밖에 없지 않은가’
몇몇 기자를 불렀습니다. 정동의 오래 된 수타 자장면 집이었습니다.
“한 번 들어봐라. 뭐냐고 묻지 말고 그냥 들어봐라. 느낌이 차 오르면 그만큼의 기사를 써라.”
기자들은 앞 다투어 기사를 썼습니다. 그는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사실 홍보도 필요 없었습니다. 누군들 묵은 장맛을 모르겠습니까. 한 번 들으면 그대로 빠져들고 마는 우리의 한 맺힌 소리고 그 한을 단박에 풀어 제끼는 소리였으니까요.
찔레꽃은 그 자신의 노래였습니다. 그가 쓰고 곡을 붙였습니다. 정석은 아닙니다. 그냥 가슴에서 머리에서 나오는 대로 만들었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엇박자이기도 합니다.
찔레꽃은 옛날엔 동네 앞뒷산 언덕배기에 지천으로 피었습니다. 작고 하얀 꽃이 아름다웠지만 흔한데다 가시도 있고 해서 집 마당엔 잘 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향기는 그야말로 예술입니다. 화려한 장미꽃 백송이 보다 찔레꽃 한송이의 깊은 향내가 더욱 진하고 은은합니다.
마당 뒷켠에 숨어서 피지만 향기는 마당 전부를 휘감아 버리는 찔레꽃. 힘들고 고단했던 시절, 장사익씨는 그 찔레꽃이 마치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장사익류. 그에겐 장르도 무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흔 여섯이었습니다. 장사익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결코 담아둘 수 없는 묵히고 묵힌 소리로 단숨에 대중 속으로 깊이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더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입소문은 대단했습니다. TV에 얼굴 한 번, 라디오에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음에도 장사익을 듣는 사람들이 하루게 다르게 늘어났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섰습니다. 몇몇 작은 공연장을 거치 뒤 였습니다. 작은 공연장들과 마찬가지로 세종문화회관도 바로 매진이었습니다. 설마하면서 걱정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그의 소리는 이미 우리 모두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동백아가씨’는 신인급 이미자를 일약 최고의 가수로 발돋음시킨 노래입니다. 1963년 쯤 가요프로그램에서 35주동안이나 1위를 차지한 대단한 곡이죠. 하지만 청승맞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젊은 사람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어느 날 ‘동백아가씨’을 금지곡으로 묶었습니다. ‘왜색(일본색)’이 짙은데다 가사가 너무 부정적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우리의 대중가요는 뻔한 멜로디 때문에 ‘뽕짝’으로 비하되었습니다. 일본의 엔카와 비슷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왜색이 없지는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굳이 부르지말라고 할 일은 아니었죠.
장사익은 그 ‘동백아가씨’를 ‘찔레꽃’ 뒤에 실었습니다. 누가 그 노래를 ‘청승맞다’고 했습니다. 장사익의 ‘동백아가씨’는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했습니다. 애잔한 느낌은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청승은 한순간에 날아갔고 멍든 가슴은 말끔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모든 노래를 자기의 소리로 바꾸었습니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오랜 노력으로 인해 이젠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그의 소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장사익 류’입니다.
그에겐 무대도 따로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생목’으로 불어제끼면 됩니다. 어떨 때 생목이 더욱 애절하고 후련하고 시원합니다.
어쩌면 그는 장례식장에서 노래한 첫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조영남씨가 언젠가 말했습니다. 죽을 때 부를 자신의 노래가 있어야 되겠다는 이야기 였죠. 사람이 죽어 슬픈 마당에서 ‘딜라일라’나 ‘화개장터’를 부를 수는 없는 일이죠.
그러나 장사익의 소리는 산자에겐 치유이고 망자에겐 저승길 동무입니다.
장례식장에 딱 어울리는 소리. 실제로 장시익은 상가에서 ‘찔레꽃’ ‘하늘 가는 길’을 목청껏 내질러 상주와 망자를 위로했습니다.
저의 부친상에서도 그는 망자를 달래는 소리를 해서 상주는 물론 많은 문상객들을 울게 했습니다.
장사익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렸을 때는 음치인줄 알았다. 선생님이 그랬으니까
‘넌 아무래도 음치 같다’
중학교 음악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노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조금 다른 그의 소리에 반 친구들 역시 웃음보를 터뜨렸다. 선생님의 그 말은 오래 갔습니다.
그 후로 쭉 노래를 멀리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 온 후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IMF 때는 갑자기 일 자리를 잃기도 했습니다. 이것 저것 안 해본 게 없었습니다. 험하고 힘든 일도 마다 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카센터, 전자제품 판매, 보험 등.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것도 있지만 기실 변변치 않았습니다.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태평소를 집었습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들었던 흥겨운 가락에 금방 젖어들었습니다. 30대 때 취미 삼아 해 본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재능이 폭발했습니다. 그의 흥겨운 태평소는 전주대사습놀이 공주농악, 금산농악 장원으로 이어졌습니다. 노는 마당이 자연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소리를 했더니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소름 끼치는 소리. 사람들은 온몸에 털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고들 했습니다.
음반을 한 장 더 냈습니다. 이번엔 CD였습니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산길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더니
꽃구경 봄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웅큼씩 한 웅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일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어버이날은 절대 듣지 말아야 할 ‘꽃 구경’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면서 알은체 하지 않고 혼자 돌아가다 길 잃을 아들 생각에 걱정이 태산같은 어머니. 꽃 구경이 꽃 구경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더러는 생각하지 않아도 그 구성진 가락 때문에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 울컥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참 묘합니다. 울컥하건만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들으면 슬프고 찡한데 듣고 나면 시원해 집니다. 그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장사익만의 소리 맛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의 소리 맛 뿐이 아닙니다. 사람도 그대로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나 30여년이 흐른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이 사랑하고 아끼는 인기인이지만 그 옛날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냥 달려갑니다. 계산이 서지 않는 사람인데 그는 어떤 경우든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합니다.
자연인입니다.
“한 3년 마음 먹고 해보자 했던 것이 어느 새 30년입니다”
그의 무대는 늘 관중들로 들끓습니다. 늦었다고 시작도 않으려 했는데 28년이 훌쩍 흘렀습니다. 뒤돌아보니 40대가 청춘이었습니다. 하지만 칠순의 소리꾼은 지금도 청춘입니다. 그의 소리는 나이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냥은 아닙니다. 매일 매일이 ‘강훈’의 연속입니다.
공연이 없을 때면 잊지 않고 북한산을 뛰어 다닙니다. 1시간은 보통입니다. 처음 소리를 할때부터의 습관입니다. 평창동에 살다가 홍지문 쪽으로 이사 갔어도 코스는 북한산 주택가의 높고 낮은 길입니다.
운동에 방해된다고 핸드폰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하긴 평소에도 그는 핸드폰 없이 잘 돌아 다닙니다. 일정 밖에서 가끔 움직이는데 그럴 때면 찾느라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직도 청춘의 소리. 매일 매일이 ‘강훈’의 연속입니다
2시간여를 혼자 공연하자면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소리도 힘이 없으면 나오지 않는답니다.
달리지 않을 때는 기타 줄을 튕깁니다. 거의 하루 온종일 그러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보는 사람이 지겨울 정도입니다. 지치면 글씨를 씁니다. 그의 붓글씨는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만의 특별한 ‘장사익 체’입니다. 마음이 소리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대 결절도 무사히 넘겼습니다.
장사익은 칠순을 넘겼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소리도 늙습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고 순리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소리는 세월과 달리 갑니다. 달리 갈 정도가 아니라 더욱 깊어졌습니다. 우리네 삶의 한과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장사익은 날 때부터 소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신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