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재 기자] 95세. 누구도 그를 할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다. 다섯 살 남자아이는 형이라고 불렀다. 일곱 살 여자 어린이는 앙증맞은 목소리로 ‘오빠’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아버지인 그는 만면에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90살 연하의 어린이 볼에 뽀뽀를 하고...삼십 수년간 그는 일요일 12시쯤 KBS 브라운관을 통해 우리들 안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길고 긴 오프닝 멘트를 날렸다.
“...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서 새로운 희망 속에 열심히 살아가시는 해외 우리 동포 여러분, 해외 근로인 여러분... 그리고 오늘도 푸른 대해를 가르는 외양 선원 여러분, 원양 선원 여러분, 모든 항공인 여러분, 대한민국 국군 장병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전국노래자랑 사회 담당 일요일의 남자 송해가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전~국 노래 자라~앙“
그 긴 세월 그는 언제나 서민들과 희로애락을 나누었다. 어찌 그리 자연스러운지 보는 사람 모두 그의 한마디 한 동작에 빠져들고 만다. 그의 삶 또한 그곳에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박시명과 함께 만담식 코미디를 했던 그는 오랫동안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방송을 진행했지만, 갑자기 그만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뒤였다.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먼저 가버렸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갈 수 없었다.
술과 시름의 나날로 만신창이가 되어가던 어느 날 전국노래자랑 PD가 찾아왔다. 전국을 누비며 보통 사람들과 함께 비비고 문지르며 슬픔을 어루만지자고 했다.
그게 1988년 5월 화창한 봄날이었고 그는 어느새 일요일 한 낮의 풍경이 되었다. 그냥 노래자랑 사회자에 불과했지만, 그는 결코 ‘그냥’이 아니었다.
수년 전 조준희 기업은행장이 ‘참신한 광고 모델’을 놓고 고심하다 그를 선택했다. 모두 난리였다. 은행 관계자들은 물론 광고회사에 다니는 딸조차 기를 쓰고 반대했다. 역효과라고들 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1천억 원을 유치하는 톱 홍보대사가 되었고 기업은행을 서민의 은행으로 변모시켰다. 그들은 그가 소탈하고 푸근해서 좋다고 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모르고 있었다.
고민사를 털어놓으면 주저앉아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 주었던 우리네 서민들의 영원한 벗, ‘딩동댕’ 못지않게 ‘땡’을 사랑했던 송해 씨가 갔다. 반주로 빨간 뚜껑의 소주 한 병은 거뜬할 정도로 단단했기에 설마 했는데 훌쩍 가버렸다.
그는 이번 주 일요일 그곳에서 방송을 진행할지도 모른다.
“천국 노래 자라~앙”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