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기자 우연히 먹어 본 피자가 확 입맛을 당겼다. 밀가루로 만든 얇고 납작한 반죽에 토마토 소스와 치즈 등 토핑을 얹어서 구워낸 이탈리아 피자를 처음 먹어보자 마자 “앞으로는 피자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30년전인 1992년 무렵이었다. 무작정 본사 사장을 찾아가 점포를 하나 내달라고 생떼를 썼다. 막무가내식 그의 요구는 마침내 빛을 발했다.
서울 잠실에 처음으로 도미노 피자 가맹점을 냈다. 사업에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1989년 1월 4년여간 다녔던 국민은행에 사표를 쓴 뒤 내 사업을 하기 위해 카스테레오 제조회사, 3M대리점, 편의점 사업을 하면서 사업에 대한 기초원리를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1년간 피자 가게는 순풍에 돛 단 듯 잘 나갔다.
1993년 8월15일 광복절, 새로운 운명이 펼쳐졌다. 세계 최대 피자배달 프랜차이즈기업인 미국 도미노피자의 한국 사업권을 놓고 대기업과 벌인 인수경쟁에서 잠실점을 운영하던 소상인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마치 성경 속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다. 피자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1년만에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한국 도미노 피자는 이때부터 한국 외식업계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다. 안방에서 배달해 먹는 '배달피자'의 개념을 한국에 최초로 도입한 데 이어 30분 배달 보증제, 고객만족보증제, 요리피자, 원넘버 주문서비스와 스마트폰 주문서비스 등의 차별된 마케팅 전략으로 지난해 매출 3000억원대의 프리미엄 요리피자 시대를 열었다. 1999년 100호점, 2003년 1월 200호점을 개점했고, 2022년 6월 현재 478호점을 운영 중이다. 도미노피자는 명실상부한 배달피자 No.1 브랜드로 화려한 명성을 쌓았다.
야심찬 도전으로 대기업을 제친 영세상인
한국도미노피자 오광현(63) 회장은 "1993년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가슴이 뛴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꿈만 같았다. 미국 도미노피자의 한국 사업권을 따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외국 유학파도 아니고, 남다르게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강인한 의지와 적극적인 행동력에서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았다.
미국 본사 관계자들 앞에서 도미노피자를 어떻게 키워나갈 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던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미국 본사는 대기업의 재력과 브랜드파워로 시장을 선도하는 비즈니스 전략보다는 직접 점포를 운영하는 젊은이가 ‘인생을 걸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밝히는 야심찬 도전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미 잠실점을 직접 운영하면서 피자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했다. 사업 자체가 자신의 적성과 취미에도 딱 맞았다. 처음에는 한국 본사로 찾아가 체인점을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본사 차원의 마케팅과 경영전략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운영권을 팔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 본사서 일개 가맹점포 1개를 운영하는 점주가 회사를 팔라고 해 황당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미노 피자 성공요인은 최고를 추구하는 1등정신
도미노 피자 광고를 보면 늘 당대 최고 스타가 나온다. 2022년 TV광고는 최고의 CF스타 2PM 스타 이준호와 걸스데이 혜리를 광고모델로 발탁해 ‘운명적 만남’이라는 콘셉트로 신메뉴와 함께 내보냈다. 이는 1등정신을 표방하는 오 회장의 창조적 도전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도미노피자가 배달피자업계 1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 수 있었던 배경 뒤에는 창조적 도전정신을 의미하는 '크리에이티브 도미노(Creative Domino's) 정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정신은 창조적인 신제품 개발을 자극했고 피자시장을 선도하는 힘이 됐다.
피자를 대표적인 외식 상품에서 배달상품으로 바꾸게 한 것도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도미노피자 가맹점을 하기 전까지는 피자는 어린이날 등에나 한 번씩 먹던 별미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피자를 자장면만큼 많이 시켜먹는 때가 온다”는 신념을 갖고 피자배달 사업의 차별화와 독창성에 집중했다.
다른 회사의 전략을 베끼는 방법을 거부하고 우리 입맛에 맞는 우리만의 피자를 만들었다. 2003년 7월 탄생한 더블 크러스트 피자가 대표적이다. 크러스트와 크러스트 사이에 카망베르 치즈를 넣어 만들었는데 대히트를 쳤다. 당시 매출이 20~30%로 크게 늘어났다. 똑같은 피자라도 경쟁사와 차별화하는 독창성이 주효했던 것이다.
오 회장은 수입 브랜드의 한계를 뛰어넘어 피자를 우리 맛으로 전환하는 창조적인 신제품 개발을 하기도 했다. 업계 최초로 해산물을 토핑으로 사용하는 '더블 크러스트 씨푸드 피자'를 개발했다. 더블 크러스트 위에 해산물을 올린 것이었다. 광우병 파동이 일면서 매출은 순식간에 급증했다. 2007년부터는 업계 최초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세계적인 요리의 맛을 피자와 접목하는 '요리피자'를 내놓았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까다로워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창조적인 발상으로 제품을 차별화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오 회장의 아이디어는 신제품을 낼 때마다 반영됐던 것이다.
주문ㆍ배달서비스 차별화로 경쟁력도 향상시켰다. 2002년 전국 점포를 하나의 번호(1577-3082)로 연결해서 주문받는 원넘버 시스템을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는 이 같은 전화번호 서비스가 없었다. 뒷번호는 30분 내 빨리(82) 배달하겠다는 뜻이다. 호주 출장길에 우연히 아이디어를 얻었다. 2003년에는 국내 외식업계 최초로 온라인 주문 시스템을 구축했다. 2007년에는 업계 최초로 한 페이지에서 주문이 가능한 '리아(RIA)시스템'을 도입했다. 국내 최초로 외국인 대상 영문 주문사이트도 문을 열었다. 이처럼 주문시스템을 지속적으로 혁신한 결과 결제시스템 부족으로 10%에 그쳤던 온라인 주문은 현재 40%를 넘어설 수 있었다.
배달회사의 경쟁력은 주문과 배달을 쉽게 하는 고객 편의성에서 나온다. 오 회장은 이를 간파하고 주문ㆍ배달서비스의 차별화에 주력했던 것이다. 지난 5월에는 국내 외식업계 최초로 스마트폰에 주문형 앱 서비스를 오픈해 주문서비스를 혁신했다. 현재 14만여 명이 앱을 다운받아 9억여 원의 매출을 발생시켰다. 트위터도 개설해 현재 폴로어가 7400명에 육박한다.
돈 잘 벌고, 잘 쓰는 CEO
돈은 더 이상 생존수단만은 아니다. 그는 돈을 왜 버는가에 대한 고민을 젊은 시절부터 스스로에게 늘 했다고 한다. 돈이 많다는 것은 지위가 높음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지위가 높을수록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따라서 사회 공동체를 위한 곳에 돈이 쓰여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많이 생각한다.
그가 도미노 피자를 인수할 당시 점포들은 모두 후미진 뒷골목에 있었다. 배달피자는 전화번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대료가 비싼 대로변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문제점과 해법을 찾아냈다. 뒷골목에서는 1등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돈을 빌려 점포를 대로변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결과 매출이 20~30% 늘었다. 또 점포 위치를 옮기는 것만으로 영업이익도 뛰었다. 동시에 도미노에 대한 브랜드 파워도 점차 커져나갔다. 대로변에 간판이 들어서자 '도미노'란 브랜드를 알아주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갖고 가맹점 전략으로 '3+1전략' 내놓았다. 가맹점이 3개 늘어나면 직영점 1곳을 오픈하는 전략이다. 직영점 비율을 적당히 유지해야 브랜드 리더십을 지킬 수 있었다. 가맹점 모집은 점포의 수익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익이 좋아야 가맹점 모집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익을 높이기 위해 모든 점포의 위치는 대로변 전략을 썼다. 곳곳에 도미노피자를 알리는 간판이 들어서자 스스로 사업을 해보겠다는 사업주들이 몰려들었다. 모집광고 대신에 사용했던 입소문 마케팅과 추천제가 큰 효과를 발휘했다. 요란한 광고보다 실제 사업을 하고 있는 점주들의 추천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점포 수는 순식간에 100개를 넘어섰던 것이다.
오 회장은 현재 가맹점과 상생을 위해 '도미노 파트너스 파운데이션(Domino‘s Partners Foundation)'을 통해 100% 본사 비용으로 매출 부진 가맹점에 식자재를 제공하거나, 불가피한 사유로 휴무가 필요한 점포에 최대 2일, 최다 2명의 본사 직원을 지원하는 시스템까지 운영 중이다. 전 세계 도미노피자 64개국 가운데 한국법인을 매출 톱5 안에 드는 회사로 도약시킨 오 회장은 최근 홍콩의 유명 맛집 ‘팀호완’ 국내 1호점을 열고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기도 한다.
오 회장의 사회 봉사활동은 업계에서도 소문나 있다. 어린이 환우 돕기, 스포츠 단체 후원, 어린이 교통안전 문화 만들기 등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분야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오래전부터 서울대 어린이병원의 20명의 환아의 수술비를 지원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 프로야구, 육상 연맹 등에 경기력 향상을 위한 기금을 내놓고 있다. ‘어린이 교통안전 릴레이 챌린지’ 캠페인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리틀야구 소년에서 싱글골퍼까지...승부를 마다하지 않는 운동마니아
그는 성균관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2년4개월간 육군 30사단 야전 소대장으로 성공적으로 복무를 마쳤다. 군대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국가를 위해 장기복무를 한번 해보는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초등학생 때까지 리틀야구를 한 야구광이었다. 중학교 이후 전문적인 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어떤 운동도 자신이 있었다. 필자와 ROTC 동기였던 그는 소위 때 광주보병학교 중대대항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중대 대표선수로 맞붙은 적이 있다. 1982년 5월 비가 세차게 퍼붓던 날, 잔디 연병장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 공격수로 뛰던 그가 속한 중대가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얼마나 운동을 좋아하고 승부욕이 많은 지를 엿보게 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리틀야구대회와 축구 대회 등을 후원하면서도 승부를 마다하지 않는 그의 운동 욕심은 아직도 대단하다. 아마 골프업계에선 로우핸드로 각종 동호인 대회나 친선 대회에서 빼어난 실력을 과시한다. 골프 고수들이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한 남서울CC 클럽대항전에서 4강까지 올랐던 적도 있다. 항상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린다는 그의 삶의 철학이 운동관에도 잘 나타난다.
운동을 좋아하는 인연으로 모교인 성균관대 체육인회 회장을 지난 2000년대 초반 맡은 데 이어 지난 2년전부터 주위의 강권에 의해 다시 이끌고 있다.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