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호 Vol.13

[VOL.5] ‘유소년~초보자~동호인~전문선수 육성까지 테린이 시대 선도’

산학협동 M스포츠아카데미
명지대학교 테니스부 총감독 노갑택 스포츠학부 교수

엔터테인먼트 2022-10-07 15:31 정태화
[VOL.5] ‘유소년~초보자~동호인~전문선수 육성까지 테린이 시대 선도’
“골린이 가고 테린이 시대가 왔다.”

요즘 MZ 세대들 사이에 테니스 열풍이 불고 있다. 코로나 19 펜데믹과 함께 조금씩 일기 시작하던 테니스 열풍이 이제는 MZ 세대들의 대표적인 생활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이 덕분에 테니스 용품이나 테니스장 운영, 테니스 강습 등 단순히 테니스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에서부터 테니스 패션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면서 ‘테니스 산업’이란 말이 새롭게 등장할 정도가 됐다.

이렇게 테니스가 MZ 세대들의 핫 스포츠가 된 데는 여러 가지 연유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몇가지 요인이 꼽힌다.

시간당 평균 500㎉ 열량을 소모하는 고강도 운동으로 다이어트에 효과적이고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일상화됨에 따라 신체 접촉이 없는 스포츠인데다 인증사진 찍기 좋은 예쁜 복장이 서로 경쟁심까지 부추기면서 젊은 층의 소통공간인 SNS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골프와 함께 전통적인 귀족운동이지만 레슨비나 장비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시간과 장소 접근성이 좋다는 점도 MZ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여기에 2018년 한국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정현 선수가 세계 4개 메이저대회 가운데 호주오픈테니스에서 세계최강의 노박 조코비치를 꺾고 4강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세계 무대에서 끊임없이 정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세계 랭킹 74위 권순우(당진시청)를 비롯해 테니스의 성지인 윔블던에서 14살부에서 우승한 조세혁 등 잇달아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국내파 선수들의 국제무대에서의 잇단 승전보도 테니스 붐을 일으키는데 큰 몫을 했다.

이런 가운데 노갑택 교수(58·명지대학교 스포츠학부 학부장)는 ‘전문 선수 육성’과 ‘테니스 저변확대‘를 통해 ’테니스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노갑택 교수는 국가대표 스타 플레이어 출신에다 국가대표 감독까지 역임한 정통 테니스인. 그는 명지대 스포츠학부 교수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최초로 테니스연구센터를 설립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전문선수 육성에 나서는 한편 2019년 M스포츠아카데미(테니스센터)를 개설해 테니스를 배우기 원하는 젊은 세대들을 함께 호흡하며 테니스 대중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VOL.5] ‘유소년~초보자~동호인~전문선수 육성까지 테린이 시대 선도’


테니스 10대 돌풍의 주역

노갑택이 테니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울산 제일중 1학년때인 1977년도였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우연한 기회였다. 수요일 특별활동에 테니스가 있었고 때마침 학교 교장이던 아버지가 사다 놓은 테니스 라켓이 있어 이것을 가지고 특별활동에 참가한 것이 전문선수로 발을 들여 놓게 된 시초였다.

노갑택은 테니스에 관한 한 영재였다. 불과 몇 개월을 배우지 않고 선배들을 누르는 실력을 갖추면서 전국소년체육대회 경남대표로 선발돼 두각을 나타냈고 경남에서 테니스 최고 명문고인 마산고에 진학하면서부터 전국무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고교 2학년때는 전국대회 3관왕에 올라 이미 ’국가대표는 시간문제‘라는 말을 들었고 3학년때인 1982년에는 그야말로 ’한국 테니스 노갑택 천하‘의 서장을 연 한해였다.

이해 4월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 남자 단식 패권을 안아 10대 스타 자리를 굳힌 노갑택은 제26회 전국남녀테니스초청대회 남고부 패권을 안았는 등 이전까지 5개 단복식을 모두 석권하는 상승세로 고교 무대에서는 아예 상대가 없었다. 특히 9월에는 US오픈대회에 까지 참가하고 돌아온 뒤 강력한 서브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발리 공격을 하는 공격적인 테니스를 구사하면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리고 이해 10월 노갑택은 고교 졸업반으로 대학과 실업 선배들을 대상으로 소위 ’도장깨기‘에 나서면서 한국테니스계에 큰 충격과 함께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바로 1982년 한해의 한국테니스대회를 결산하는 제37회 전한국테니스선수권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실업과 대학의 강자들을 차례로 누르고 대회 사상 처음으로 고교생이 남자부 단식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이미 대회 시작전부터 ’태풍의 눈‘으로 지목되었던 노갑택은 준준결승전에서 데이비스컵 대표를 지낸 김봉수(울산공대), 준결승전에서는 30대 노장 주창남(대우)마저 꺽어 대학의 패기와 실업의 노련을 모두 잠재우는 파란을 일으켰다. 결승전에서는 김영환(당시 대우)에게 3-1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당시 한국남자 테니스 사상 최강인 김춘호-전영대 시대의 바통을 이어 받아 ’제2의 전성기‘를 구사할 노갑택 시대가 올 것이라는 데는 그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노갑택을 향한 대학팀들의 스카우트 유혹도 많았는데 건국대와 명지대와의 스카우트전에 휘말려 말썽을 빚기도 했다. 당초 건국대는 1000만원을 노갑택 앞으로 예치해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도록 했다는 말까지 나돌았지만 노갑택의 최종 선택지는 예상을 깨고 명지대였다.

노갑택이 건국대 진학을 포기하고 명지대를 선택한 것은 명지학원 유영구 이사장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과 존경심의 발로였다.

노갑택은 “당시 유영구 이사장이 어떻게 대우를 해 주면 명지대로 오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 어머니가 좀 편찮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돈은 필요없다. 어머니가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실 수만 있다면 된다”고 이야기했고 이를 들은 유영구 이사장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해서 명지대학교를 택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VOL.5] ‘유소년~초보자~동호인~전문선수 육성까지 테린이 시대 선도’

’테니스로 대한민국 최초‘가 된 노갑택

노갑택은 마산고를 졸업하고 명지대에 입학하면서 테니스에 관한 한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달고 다녔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곧바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가 됐고 1984년 LA 올림픽에는 이수산나와 함께 우리나라 테니스 선수로 첫 올림픽에 출전하는 영예도 안았다. 테니스 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지만 1984 LA 올림픽에서는 시범경기로 대륙별로 선수들이 한 팀을 구성해 출전했다.

그리고 이해 11월에는 2년전 고교생 신분으로 준우승을 했던 전한국테니스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전해 우승자인 김춘호를 그리고 결승전에서 대학선배인 이우룡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국내 정상에 섰다.

당시 동아일보는 노갑택의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 ’잇단 새 얼굴…테니스 정상 오래 즐길 여유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그만큼 이때 우리나라 남자 테니스는 아시아 최강으로 대선수들이 즐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테니스 코트에 거세게 세대 교체의 바람이 일고 있다. 정상을 지켜 오던 선수들이 후진 선수에게 밀려 전에없이 빨리 정상의 자리를 내 혼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이르고 있다.

대학 2년생 노갑택(명지대·20)이 기라성같은 국가대표 서배들을 제치고 전한국선수권대회에서 우승, 새 세대의 기수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79년부터 당시 대학 1학년생이던 전영대 이우룡 김춘호 전창대 등 큰 재목이 대거 등장하면서 한국의 코트는 물론 ‘아시아 코트’까지 석권해 왔다. 80년에는 송동욱이 가세했고 다시 지난해에 울산공대의 세력인 김봉수와 유진선이 기존 판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우수선수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솟아 남자 테니스계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혼전을 펴왔다. 때문에 국가대표 선수도 4명에서 6명, 올해 다시 8명으로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노갑택의 경우 지난해까지 대학부 2, 3위권에 머물다 올 5월 국가상비군 최종평가전에서 국가대표 선배들을 모두 꺾고 전승을 기록, 테니스계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이어 가을철 대학연맹전과 전국체전을 석권하며 기량을 과시했다(이하 중략)”<동아일보 1982년 11월 24일자>

1896년 올림픽이 창설되면서 정식종목이었던 테니스는 1924년 파리올림픽부터 퇴출된 뒤 무려 64년이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정식종목이 됐다. 따라서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은 각종 국제 테니스 대회 등 참가를 통해 경험쌓기에 나서면서 노갑택도 김춘호 유진선 송동욱 등 국가대표 선배들과 함께 각종 서키트 대회에 참가했다.

노갑택은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 전지훈련 중 미국 테니스협회 순회경기로 열리는 뉴욕주 이스트세트킷 서키트 대회에 참가해 준결승에서 브레튼 그린우드(호주)에 2-1로 역전승을 한데 이어 결승전에서도 2번 시드의 케빈 모(남아프리카공화국)를 2-0으로 눌러 우승하면서 시드 배정을 받지 않고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하지만 노갑택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정작 대표선수로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부상이 발목을 잡으면서 부진까지 이어진 때문이다. 그럼에도 1986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최부길 감독의 배려로 4관왕에 오른 유진선과 함께 단체전에서 호흡을 맞춰 금메달을 따냈다.

이 부상과 부진이 길어지면서 정작 국내에서 열린 1988년 서울올림픽에는 선배인 김봉수 송동욱 유진선에 밀려 국가대표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아픔을 치유하듯 노갑택은 1988년 11월 중국 최초의 프로대회인 88중국남자챌린지대회 남자 단식 결승에서 세계랭킹 270위인 피러 카터(호주)를 제치고 우승해 건재를 과시했다. 특히 노갑택은 이 대회에서 예선 4회전에서 탈락했으나 본선 진출자의 불참으로 본선에 오르는 행운을 잡았고 결승전 첫 세트에서 0-5로 뒤져 패색이 짙었으나 이후 세 차례나 듀스까지 가는 접전 끝에 내리 7게임을 따내 역전승을 하는 저력을 보여 주위의 놀라게 했다.

이렇게 한국테니스의 황금기 한세대를 풍미한 노갑택은 1984년부터 1989년까지 6년동안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현대해상에서 실업선수로 활약하다 모교인 명지대학교 여자 테니스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인생항로를 시작한다.

[VOL.5] ‘유소년~초보자~동호인~전문선수 육성까지 테린이 시대 선도’


공부하는 테니스인으로 거듭 나

노갑택의 테니스 인생에서 또 다른 결정적인 방향은 1990년 동갑내기 테니스 선수 출신인 이진주 씨와의 결혼이다.

노갑택-이진주 테니스커플은 우정이 사랑으로 결실을 맺은 케이스다. 노갑택이 마산고 1학년, 이진주가 군산영광여고 1학년때인 1980년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주니어테니스선수권대회에 나란히 출전했다. 노갑택이 고교 1위로 명지대에 진학할 때 이진주도 여고 랭킹 1위로 경희대 테니스부 창단 멤버로 스카우트가 됐다. 1989년 노갑택이 현대해상화재보험 선수로 뛰다가 부상으로 1년간 휴업을 하던 중에 당시 경희대학교대학원 조교로 있던 이진주가 소중한 사람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1990년 12월 16일 테니스인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노갑택은 결혼을 하고 난 뒤 전성기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국가대표에는 은퇴를 했지만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대표적인 것이 1993년 제48회 전한국테니스선수권대회 결승까지 오른 것이다. 노갑택은 9년만에 패권탈환을 노렸지만 준결승전에서 당한 엄지발가락 염증까지 겹치면서 명지대 후배인 윤용일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1984년 학교선배인 이우룡을 제치고 우승한 것처럼 9년 뒤에는 후배에게 우승을 빼앗겼다. 하지만 노갑택은 고교 3학년때인 1982년 준우승-1984년 우승-1993년 준우승으로 한국테니스선수권대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리고 1993년말 실업선수을 마감하고 은퇴를 할 즈음 때 맞추어 모교인 명지대학교에서 여자팀 감독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서 노갑택은 이를 흔쾌히 받아 들이면서 새 여정을 시작한다. 명지대가 노갑택에게 감독 제안을 한 것도 물론 노갑택이 명지대를 졸업한 동문으로 테니스계를 휩쓴 스타플레이어인 덕택이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그의 순수하고 성실한 인간성이 더 높은 점수를 준 덕분이었다.

이는 바로 명지대에 처음 스카우트될 때 어머니를 좋은 병원에서 치료해 주면 된다는 지극한 효심에다 명지대를 실업팀인 현대해상으로 옮기면서 후배선수들을 위해 학교에 대형버스를 기증한 마음 씀씀이까지 모두 유영구 이사장에게 큰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노갑택도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는 유영구 이사장이 계시고 초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아버지(노인준·울주동핵국교장)의 영향으로 교육자의 길에 동경이 맞물렸다.

명지대 여자테니스팀을 맡은 첫해부터 전국 무대를 평정하고 세 차례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은 노갑택은 다시 변신을 시도한다. 바로 1994년 대학원에 진학해 교육자로서 첫 발을 떼는 한편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테니스 연구를 위해 당시로서는 쉽지않은 국제심판이자 호주 토너먼트 디렉터인 짐 무어의 스폰서쉽으로 1998년 호주 유학길에 올랐다.

노갑택은 당초 1년 예상했던 호주 생활은 2년으로 기간이 늘었고 이 동안 호주 청소년 코치로 세계 랭킹 10위까지 오른 엘레나 로키치를 배출하는 등 능력을 보이면서 호주에서는 아예 한국에 돌아가지 말고 호주에서 코치를 하라는 권유까지 받을 정도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노갑택은 1999년 박사과정에 입학해 2002년 스포츠 심리상담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3년부터 명지대학교 스포츠학부 교수로 임용됐다.

이와 함께 노갑택은 2002년~2004년, 2014년~2016년 각각 3년씩 두 차례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는 이형택,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때는 정현을 지도하며 우리나라 테니스를 세계 무대로 한수준으로 올려 놓은 선수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VOL.5] ‘유소년~초보자~동호인~전문선수 육성까지 테린이 시대 선도’


산학스타트업 M스포츠아카데미 창업

명지대 테니스부 총감독이자 스포츠학부 교수로 새 출발을 한 노갑택 교수의 첫 작품은 우리나라 대학 최초의 테니스 연구센터 설립이다. 이는 전국 대학 가운데 스포츠의 기록분석학과가 유일하게 있는 명지대의 특성을 한껏 살린 덕분이지만 테니스계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우선 당시까지만해도 테니스는 기록분석이란 것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영상 분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코치와 감독의 경험에 비춰 자세가 좀 틀려졌다. 스트로크 때 각도가 틀린다 등 경험에 의한 지도가 대부분이었다. 이를 영상을 통해 정확하게 분석하게 교정함으로써 단점을 보완해 경기력 향상에 큰 효과를 보았다.

이와함께 부상이나 부진에 빠져 있는 선수들의 심리 카운슬링을 통해 재기 의욕을 북돋워 주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선수들이 스스로 연구하는 분위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테니스를 전공으로 하는 석·박사 양성으로 이어졌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명지대학교 남녀 테니스팀 정종삼. 최진영 감독이 모두 테니스 관련 박사학위를 받아 스포츠학부 전문교수를 맡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노 교수는 테니스연구센터를 통해 테니스 보급에도 앞장섰다. 체육인재육성재단과 용인시의 지원을 받아 테니스 매뉴얼을 만들어 경기도 전체 중고등학교에 보급하기도 했다. 또 연구센터를 확장해 학교와 합동으로 사회교육원에 테니스 아카데미를 개설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테니스 강습을 실시, 지금까지 3500여명 이상에게 테니스 보급도 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이 산학협동 스타트업으로 ‘노갑택 교수의 연구실은 실업 창업실’, 테니스장은 실습장‘으로 활용하는 2017년 M스포츠아카데미를 창업하는 계기가 됐다. 테니스가 비싼 귀족운동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중들이 좀 더 친숙하고 적은 비용으로 테니스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한편으로 장기적으로는 전문선수 발굴까지 이루어 내고 싶은 욕심이 여기에 숨어 있다. 유소년부터 초보자, 일반 동호인 뿐만 아니라 전문 선수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국내 최고의 테니스 아카데미를 꿈꾸고 있다. 명지대 테니스팀 정종삼 최진영 남녀 감독을 포함해 박사들이자 국가대표 출신들인 석현준, 손준태 씨 등이 M스포츠아카데미의 전문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갑택 교수는 앞으로도 테니스는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스포츠로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우선은 테니스가 코로나 19로 비대면 생활에다 거리두기에서 안전하다는 측면으로 붐을 일어나기는 했지만 해외 유학을 다녀 온 MZ 세대들이 늘어나고 고급 운동으로서 테니스를 인식하는 데다 자기 관리를 위한 삶의 질 향상 측면에서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앞으로도 확산세는 이어질 것이라고 바라봤다.

“평생을 테니스로 살아왔다. 아카데미도 하고 영재발굴도 하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 아카데미에서 영재를 키워서 세계 유수의 메이저대회에 출전해 톱 10에 드는 선수를 육성하는 게 꿈”이라는 노갑택 교수의 장밋빛 희망을 응원해 본다.

[정태화 월간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 sns
  • sns
  • mail
  • print

저작권자 © 월간마니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