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늘 꿈을 꾼다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의 것이고 함께 꾸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대단한 꿈은 아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돈키호테의 꿈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움직이고 조금만 더 손해보고 노력하면 되는 ‘소박한 꿈’이다.
그 꿈의 길은 그래서 누구나 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선뜻 그 길을 가려하지 않는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그 길을 청년 천범룡은 걸었다. 그리고 삼십 수년 여전히 걷고 있다.
모습이 바뀌고 자세가 바뀌고 위치가 바뀌었어도 그는 변함없다. 지금은 이름도 없어지다시피 한 빈민운동가.
관악구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이 되자마자 공무직 주 5일제를 시행했다. 대부분 안된다고 했고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방법은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주 5일제나 최저 생활 보장에 앞장 서야 하는 공공기관임에도 그들은 편법을 쓰고 있었다. 하루 8시간 근무를 7시간으로 조정한 후 주말에도 근무시키는 꼼수였다.
행정직은 일찍부터 주 5일제였다. 주 5일제는 공무직의 오래된 큰 바램이었다. 우선 바꾸었다. 그리고 대책을 세웠다. 문제 없었다. 함께 행복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관악에서 35년입니다. 이십대 청년이었죠. 소외되고 힘 없고 차별받았지만 소중한 이웃이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 정작 더 큰 도움을 받은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시대와 함께 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의 자의식이 깨어 있었다
조선일보는 월급이 꽤 괜찮았다. 그래서 신혼임에도 아무런 불만 없이 전주로 내려갔다. 소속은 판매국이었으나 기자 대접을 받던 1980년대 중반이었다.
아침 일을 끝내면 피로가 몰려들었다. 머리도 식힐 겸 좋아하는 클래식을 듣기 위해 전북대 앞 음악감상실에 가끔 들렀다.
주인 조성용씨는 사회운동가였다. 서슬 퍼런 전두환 시절을 한탄하며 움직이는 행동가였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을 보면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도 생활은 계속했다.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었다. 전주에 내려왔던 3년전 그가 아니었다. 겉은 그대로였지만 속은 운동가였다.
마음은 있지만 행동은 없었던 그에게 ‘운명’이 다가왔다. 민주화의 열망을 안고 한겨레신문이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일을 선택했다. 한겨레신문을 국민 모두가 보게 하는 일이었다. 미래가 불투명한 한겨레신문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월급은 3분의 1이 될까 말까였으나 따지지 않았다. 그 길이 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다.
조선일보를 판매하는 일과 한겨레를 판매하는 일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에겐 사뭇 달랐다. 조선일보는 생활이었으나 한겨레는 자부심이었다.
한겨레 판매국 본사 근무를 위해 상경했다. 난곡으로 스며 들었다. 처가가 있는 곳이어서 자연스러웠다. 그 사이 둘째를 낳았다. 두 아이와 조금 세월이 흐른 후 그의 인생 ‘스승’이 되는 아내와 함께 4식구였다.
그렇게 흘러 들어 온 난곡은 운명이었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 온 아내 최보경은 바빴다. 꿈나무 공부방의 실무를 맡고 있었다. 난곡 달동네의 대모 김혜경의 의원 공약 사업 중 하나였다.
많진 않지만 그래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그보다 더 시간이 없었다. 엄마 손이 절실한 두 아이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회사에서 돌아온 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많아졌다.
뜻을 같이 하고 한 마음으로 인생을 걷는 아내였다. 이해는 했지만 불만은 쌓였다. 어느 날 밤이 늦어도 돌아올 줄 모르는 아내의 일터로 찾아갔다. 도대체 뭔 일인지 알고 싶었다.
실수였다.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도 그들은 온몸을 다 바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실상을 알아보고 말리자고 간 것인데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아내는 물론이고 봉사자들의 뜨거운 열정이 부러웠다.
그날 이후 고민에 빠졌다. 천사와 같은 아내를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스스로 그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좋지만 생활은 어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한 번 뜻을 세우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시민운동가로 나서 ‘멋있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결심을 굳히고 아내에게 이야기하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먹고 사는 건 어떻게 되겠지였다.
‘철없는 부부’였으나 그들은 그렇게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더러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점상도 했고 험한 일을 하기도 했다.
김혜경씨도 대환영이었다. 사람 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터에 굳은 결심으로 봉사활동에 뛰어들겠다니 천군만마였다.
청년 천범룡을 찾는 곳은 엄청나게 많았다. 1995년 관악은 재개발 광풍의 진원지였다. 무차별적인 마구잡이 달동네 철거가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힘없는 주민 한 두명이 거대한 힘을 당할 수 없었다.
뭔가가 필요했다. 뭉쳐야 뭘 해도 할 수 있었다. 천범룡은 사방을 돌아다녔다. 각각의 주민회, 세입자대책위원회, 철거민대책위원회 그리고 서울대 학생 등 외곽 지원세력을 만나 힘을 합치자고 했다. 서로의 입장이 조금씩 달라서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마르고 닳도록 찾아다니고 또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관악주민연대’를 탄생시켰다.
어쩌다 관악주민연대 초대 운영위원장
주민연대는 지방자치시대에 딱 맞는 조직이었다. 사람들은 천범룡에게 운영위원장 일을 맡겼다. 그가 주도했고 앞으로도 잘 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럴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터 해야 했기에 앞뒤 재지않고 맡았다.
체계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4개 소위원회를 두었다. 주거권 확보를 위한 주거위원회, 놀이방과 공부방 등을 운영하는 사회복지위원회, 그리고 지방지방자치위원회와 마을신문위원회였다.
마을신문위원회는 뒤에 관악주민신문이 되었고 선거에 나오는 후보들의 전술과 정책을 분석하고 제안하는 지방자치위원회로 그 영역을 넓혀 갔다. 두 곳 모두 천범룡이 거치게 되는 곳이다.
주민연대는 천범룡의 날개였다. 그는 이 조직을 통해 주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철거 현장에 뛰어들어 ‘용역 깡패’들과 싸웠다. 야전 천막을 치고 주민들과 함께 100일 농성을 벌였다. 세입자 문제 해결을 위해 민선 관악구청장실을 점거했다. 강제철거를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난곡을 상여에 싣고’ 시청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조직적이고 내실을 기한 주민연대의 활동으로 부적격 세입자도 구제되었고 영세 가옥주도 길을 찾았으며 이주비도 현실화 되었다. 참 힘든 작업들이었지만 정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었고 주민연대 활동을 통해 그는 점차 확실한 빈민운동가, 시민운동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만난 건 행운이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보람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그들을 통해 제 삶은 행복해졌습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건 결국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느닷없는 남부야학 ‘교장선생님’ 그리고 발행인
길은 같은 듯 하면서도 달랐다. 다른 듯 하면서도 같기도 했다.
‘그 옛날’ 관악엔 남부고등공민학교가 있었다. 지역 주민들과 종교기관, 독지가 그리고 약간의 정부 지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선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그런데 운영이 쉽지 않았다. 있지만 없는 듯 방치되고 있자 지역 교육청이 학교를 폐쇄하려고 했다. 막아야 했다. 여럿이 뜻을 모았다. 결국 막지 못했지만 대신 남부야학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맡을 사람이 없었다. 자천타천으로 교장이 되었다. 졸업식 날 기쁨과 한으로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교장이지만 가르치는 일은 뒷전이었다. 누군가 열심히 가르치고 누군가는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더 중요했다. 열심히 했다. 야학은 그런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엉뚱한 문제가 터졌다. 토지반환 소송이 벌어졌다.
‘남부고등공민학교’ 부지는 지역주민들과 교회의 성금 등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소유주 명의를 단체로 하지 않고 목사 개인 명의로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문제의 목사가 땅을 돌려달라고 했다.
분명 공적 소유임에도 세월이 지난 후 살펴보니 주민땅이라고 내세울 법적 근거가 없었다. 세월이 좋을 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누군가 그렇게 주장하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주장하며 대토를 요구했지만 어느 날 불이 났다. 야학 건물이 몽땅 타버렸고 천범룡은 ‘화재에 대한 책임자’가 되면서 입건되었다. 굴하지 않고 움직이고 성금을 모아 다시 학교 건물을 올렸지만 무단 건축물이 되었다.
뜻이 아무리 좋아도 현실은 그렇게 힘들었다. 그런데 또 불이 났다. 할 수 없이 신림 7동 동사무소 2층으로 야학을 옮겼지만 얼마 후 동사무소 마저 철거되면서 남부야학은 8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슬픈 마지막이었으나 ‘교장 천범룡’의 지역 운동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관악주민신문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역의 훌륭한 감시자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편집장 겸 편집인이 되었다. 판매 사원이 아니라 언론인이었다. 창간 3주년 쯤에 사장으로 취임했다. 신문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별도의 사업을 했지만 관악으로 흘러 들어와 시민운동가를 활동한 후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다.
그 스스로 만든 고정급이었고 턱없이 적은 돈이었으나 사실 언감생심이었다.
관악주민신문은 지역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파고 들었다. 세입자 이주대책, 임대아파트 문제, 마을버스 비리 사건, 정화조 청소 업체 비리 등을 추적해서 폭로했다. 더러는 중앙 일간지가 기사를 받아 사회문제화 시켰다.
길에서 길을 찾는다더니 이번 길은 전혀 다른 길이었다.
천범룡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지역 전문가로 지역 사람들과 함께 지역 문제를 해결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 일만으로도 벅찼고 매일 매일 정신없이 바빴다.
“고민이 깊었습니다. 순수 시민운동가로서 한 눈 팔지 않겠다고 늘 다짐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구의원이라니 당치도 않다고 생각했죠. 구 의원도 현실 정치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002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였다. 난곡 지역운동 결사체인 ‘난곡지역단체협의회’가 천범룡을 신림 7동의 시민후보로 추천했다. 지역 일을 대변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먹혀 들었다. 1순위는 당연히 천범룡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길이었다.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협의회 관계자들이 계속 설득했다.
‘적극적으로 지방자치에 참여, 주민의 입장을 대변하며 바른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큰 지역활동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범룡은 그 일을 할 사람이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사코 거절했지만 모두들 최고의 적격자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나서기로 했다. 이왕 할 거면 정말 열심히 하자고 했다.
선거였다. 생애 첫 경험이었다. 정치는 처음부터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모든 게 어설펐다. 우선 마음을 다 잡기로 했다. 당선이 되어야 시민대표도 가치가 있지 떨어지면 모두를 욕 먹이는 것이었다.
시민후보 천범룡
결심을 단단히 하고 소위 말하는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혼자인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사방이 그의 원군이었다. 오랜 빈민 활동, 시민 운동 덕분이었다. 유권자들이 먼저 알고 지지를 보냈다. 같이 활동했던 운동가들이 너나없이 도와주었다. 이웃 뿐 아니라 먼 곳에서도 달려왔다.
“특별히 공약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시민운동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지방자치가 소수 세력가들의 사교 모임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죠. 지역의 문제점들을 나열하며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지를 알고 있었고 그런 점을 설명했습니다.”
2002년 6월 13일, 무소속 천범룡 후보가 당 소속의 모든 상대를 물리치고 구의원에 당선되었다. 득표율이 60%나 되었다. 관악구 의회 27명 의원중 한 명이 되었다. 무소속은 달랑 3명이었다. 민주당이 13명, 한나라당이 11명이었다. 무소속은 모두 그와같은 시민후보였다.
무소속 3명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런데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모두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3명의 움직임에 따라 정책이 결정될 수 있었다. 적지만 힘있는 캐스팅보트 세력이었다.
초선임에도 총부보사위원장을 맡았다. 선배 의원이 양보한 덕분이었다. 천범룡은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기에 시민운동 때보다 더 열심이었다. 빈민운동가답게 저소득층과 서민들의 입과 발이 되었다. 전국 최초로 장애인복지증진조례를 발의, 통과시켰다. 구태의연한 의회의 절차도 고쳐나갔다. 비리와 연관돼 있던 구의회 의장의 퇴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많이 뛰어다녔지만 무소속은 한계가 있었다. 더많은 일을 하기 위해 당적이 필요했다. 민주노동당도 아니고 진보 쪽의 열린우리당도 아니었다. 보수의 한나라당을 선택했다. 그동안 함께 활동했던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 맞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당이 어디든 지역을 위해 일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다.
덕분에 일은 조금 더했지만 다음 선거에 나서지 못했다. 한 번을 쉬었지만 끝은 아니었다.
쉰다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시작했고 의장이 되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좋지않은 말도 더러 들었다. 하지만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낙마했을 때도 후회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세상 물정을 살폈다. 모든 게 달리 보였다. 새롭게 보였다.
4년이 훌쩍 지나갔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 다시 나섰다. 그의 사람됨을 알고 그의 활동을 믿는 더 많은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했다. 구의회에 재입성하고 보니 할 일이 더 많이 보였다. 충분히 쉬면서 넓고 깊이 본 덕분이었다.
후반기 관악구의회 의장이 되었다. 반대자들을 폭넓게 끌어안았다. 흔히 하는 말로 화합과 상생의 의회를 만들고 싶었다.
의회의 문턱을 낮추었다. 주민과 늘 함께 하고 싶었다. 마음 먹은대로 다 하지는 못했지만 쉼터 역할을 하며 주민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덕분인지 2013년에 대한민국 의정대상 최고 의장상을 받았다. 상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인정해 준 것이 고마웠다.
시민운동가로 시작해 뜻하지 않게 들어선 정치인의 길이지만 나름 만족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과연 이길이 진정 주민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것인가하는 물음표가 자주 떠올랐다. 주민이나 국민보다는 양당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가 원했고 하고자 했던 정치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럴 때 안철수가 나타났다. 새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안철수를 욕심없는 기업가, 능력있는 학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하면 잘하겠다 싶었다. 안철수 원장이 대통령 출마선언을 했다. 그가 내세운 민생경제와 복지 등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 함께 하면 낡은 정치의 틀을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은 많았지만 결론은 안철수였다. 천범룡은 주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안철수 지지 선언을 했다. 당적을 가진 전국의 현직 기초의회 의장 중 처음이었다.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했으나 그의 선택은 미완으로 끝났다. 안철수의 생각은 옳았지만 실현시킬 힘이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완주할 힘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완전한 실패였다. 안철수가 물러나면서 천범룡도 물러났다. 한동안 일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일이 있어서 빈민활동을 하고 시민운동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그때의 판단을 후회하지 않는다. 최고의 선택이었고 결단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천범룡은 멈추지 않는다. 아직도 할 일이 많아서다.
‘낙동강 오리알’이라더니 딱 그대로였다. 오갈데 없는 신세였다. 하지만 거리낌 없었다. 실패했지만 자신의 판단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이 없었지만 일은 하면 그만이었다. 젊은 시절 일이 없을 때도 그는 이웃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일을 만들어서 뛰어다녔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지난해 관악구 시설관리공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취임식 날 즈음에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너무 슬펐고 가슴 아팠다. 취임식을 취소했다. 해도 그만이지만 억장이 무너지는 그 마음으로 취임식을 하면서 즐거워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할 일이 좀 있을 듯 합니다. 관악산 기슭을 다듬고 도림천을 아름답게 만들고 관악구민들에게 편안한 휴식 공간을 내주고 싶습니다. 법인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긴 합니다. 그저 관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공기관이라고 돈을 벌면 안되는 법은 없습니다. 법인화를 통해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고 수익을 올려 선순환을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공무직 주 5일 근무는 그런 목표의 아주 작은 시작입니다.”
천범룡은 지금도 꿈을 꾼다. 다함께 행복해지는 ‘소박한 꿈’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자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로 가야한다. 정치적이지만 정치적인 꿈은 아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향한 보통의 희망이다. 자신도 있고 열정도 있다.
그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