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없으니
때를 놓치지 말고 노력할지니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네.
(도연명 잡시)
하늘은 참 심술궂다. 인재를 낼 때는 꼭 무더기로 쏟아낸다. 그래서 치열하게 싸움을 하게 만들고 자웅을 겨루게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우리네 세상살이도 이와 다르지 않다. 더러 운이라는 것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승자와 패자는 대부분 기회를 어떻게 잡고 고난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갈렸다.
타고난 재능이 승패를 가르지만 재능이 전부는 아니다. 갈고 딱지 않으면 그 재능 역시 물거품이 된다. 행운이 팔을 벌려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안을 수 없다. 비운이 앞을 가로막아도 투지를 앞세우면 결국 넘을 수 있다.
세월은 결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세월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노력, 그건 오롯이 사람의 몫이다.
1. 군웅할거(群雄割據)
프로야구의 92학번은 인재들의 경연장이었다. 에이급 이상의 투수만 해도 10명은 되었다.
그들은 적어도 향후 10년 이상 야구바닥을 뒤흔들 주인공들 이었다. 한걸음 더 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신일고의 조성민, 휘문고의 임선동, 경기고의 손경수는 초고교급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부산, 경남지역의 염종석, 차명주, 최창양도 고교시절 우승경력이 있었다. 충청지역의 손혁, 박찬호, 정민철 등도 나름대로 내세울 게 있었다. 인천의 최원호, 대구의 전병호 등은 그다지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해 고교를 졸업하며 갈림길에서 선 그들의 첫 번째 선택은 시끌벅적했다. 프로구단과 대학이 서로 모셔가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임선동은 LG와 연세대의 표적이었다.
LG는 3억여 원의 돈다발이 든 007가방을 들고 임선동을 쫒아 다녔다. LG의 집요한 설득에 임선동은 흔들리기도 했으나 3억 원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5억 정도라면 모를까..
임은 처음 생각대로 연세대행을 선택했다. LG는 그간 들인 공이 아까워 그가 오든 말든 지명을 했다. 4년 후 대학을 졸업하면 확실히 잡겠다는 입도선매의 포석이었다.
그러나 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 한 순간의 흔들림은 임선동 야구인생의 길고도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조성민은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확실하게 고려대행을 결정짓고 일체 프로구단과의 접촉하지 않았다.
베어스는 일찌감치 조성민을 포기하고 장래성이 더 높은 손경수에게 매달렸다. 150km대의 묵직한 공을 탐내기도 했지만 잘만 구스르면 손경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손경수는 다소 갈팡질팡했다. 베어스가 내민 2억원의 계약조건을 탓하면서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결국 적잖은 장학금혜택을 제시한 홍익대로 발길을 돌렸다.
베어스 역시 4년 후를 대비해 손경수를 1차 지명했다.
공주고의 마운드를 책임졌던 손혁과 박찬호는 고려대와 한양대를 선택했다.
충청연고의 이글스는 대학행이 확고부동한 손혁은 제쳐두고 공이 엄청나게 빠른 박찬호를 붙잡아 보려고 했다. 계약금은 2천만 원 선.
컨트롤이 문제였지만 스피드에서만은 최고였던 박찬호에게 2천만원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억대 계약금설이 파다한데 그건 자존심 문제였다.
이글스는 두 선수 중 누구도 지명하지 않았다. 지명권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궁한 판인데 두고두고 기다리기 싫었다.
이글스는 대신 굴러온 복덩어리 정민철을 잡았다. 대전고를 졸업했지만 특별히 갈 곳이 없던 정민철은 거의 제발로 찾아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대기만성이라고 정민철은 프로에서의 첫 겨울을 보내며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었다.
이정길은 연세대, 차명주는 한양대, 최창양은 중앙대, 최원호는 단국대, 전병호는 영남대로 진로를 잡았고 부산고의 에이스 염종석은 롯데로 직행했다.
2. 일진광풍(一陣狂風)
학생 마운드에서 성인 마운드에 오른 이들. 새 길로 들어설 때의 성적을 굳이 매긴다면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가 선두권이고 손혁, 이정길 등 대학파들이 그 뒤 였다. 정민철, 염종석 등은 사실 순위를 다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2천만원 까지 주면서 데려다 쓸 정도는 아니라는 게 코칭스탭의 판단이었다.
훗날 프로야구는 고교 출신을 우대했지만 당시엔 대학이 먼저였다. 더 잘하는 선수는 모두 대학의 문을 두드렸고 입단 계약금도 대학을 졸업해야 억대를 받았다. 오래 마운드에 서는 걸 계산하면 당연히 한 살이라도 젊은 고교 졸업생이었지만 아무런 필요도 없는 대학 졸업장이 대우를 받았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다보면 선수 수명을 깎아 먹음에도 그저 사회통념이 그랬다.
처음 대학 진학파들의 길은 평범했다. 더러 이기고 더러 진들 두드러지게 표시나지는 않는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고 해외경기에 나가봤자 아마추어여서 크게 관심 둘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행의 두 고졸선수는 화제를 몰고 다녔다.
가정 사정 등으로 롯데에 둥지를 튼 염종석은 이겨야 할 이유가 확실했다. 겨울훈련을 거치며 어깨를 다듬은 그는 19세의 겁 없는 공으로 프로 마운드를 평정했다. 완투, 완봉승을 기록하며 무려 17승을 올렸다. 롯데의 에이스 윤학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활약이었다. 35번이나 마운드에 오르며 6번의 세이브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구도 부산은 염종석에 열광했고 그를 앞세운 롯데는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을 밟았다.
그러나 염종석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민철은 반전의 무대를 만들었다.
팀의 해외전지훈련에도 따라 나서지 못했던 정민철은 모두가 떠난 텅 빈 대전구장에서 홀로 연습하며 길고 긴 겨울을 보냈다. 외롭고 쓸쓸했던 그 겨울, 정민철은 몸을 만들며 비상을 준비했다.
김영덕감독은 불과 2~3개월 사이에 확 변한 정민철을 선발진에 끼어 넣었다. 첫 술에 배부르지는 않았지만 에이스를 향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었다.
잠잠하던 대학 마운드에도 바람이 일렁였다.
첫 주자는 손경수였다.
막상 큰 맘 먹고 홍익대로 향했으나 홍익대의 전력은 강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손경수는 점차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팀의 훈련에도 잘 빠지는 등 운동선수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가끔 했다. 학교도 통제하기가 만만찮은 이 게으른 에이스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엎친 데 덮친 격. 그의 부친이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는 일이 생겼다. 손경수는 아버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교 졸업 때 그를 지명했던 베어스를 찾았다. 계약금 7천8백만원. 2년 전 2억원의 절반도 안되는 계약금이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도 살리고 신나게 운동도 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여전히 그를 돌봐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가 노력한 보람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프로와 아마추어 대학과의 규칙 때문에 그 역시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어찌어찌해서 KBO에 신인선수 등록은 했으나 프로 마운드에 오르려면 규약 상 최소 1년은 기다려야 했다.
동시에 두 가지 목표를 잃어버린 손경수는 예의 술버릇이 도졌고 간염이라는 병까지 덮어쓰고 말았다.
최창양은 태평양을 오가는 반전을 거듭했다.
중대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간 최는 필라델피아에 입단, 마이너리그에서 수업을 받다가 한국 프로로 되돌아 왔다.
박찬호는 광풍의 핵이었다.
한양대 3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빠른 공에 매료된 메이저리그 LA다저스가 스카웃한 것. 다저스는 박찬호를 데려가기 오래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했다.(계속)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