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진(전 향암 미술관 학예연구 실장) 붓으로 무엇인가를 그린다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묵(墨)의 깊이가 어디까지 와 닿는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롭다.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 방법론으로 내면성 탐구의 절정에서, 마치 요즘 화단의 수묵 결핍을 항변이라도 하듯 10m가 넘는 대작들을 그려낸다.
화의지성(畫意至性)으로 탄생된 작품의 예술의경(藝術意景)을 가까이에서 목도(目睹)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시간, 특별한 시간, 최고의 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를 붙여보아도 될 듯한 서정(瑞丁) 이승연 작가의 작품전이다.
환력(還曆)에 걸 맞는 화업(畫業) 40여 년을 통해 “화가는 작은 조물주” 라는 말을 가히 실감케 하였다.
작가는 평소 오감(五感)을 조화롭게 하는 시간들을 붓끝으로 쏟아내며 유순한 순명(順命)의 실천철학을 강조하면서도 유유(愉愉)한 멋을 보여준다. 또한 전통적인 산수화의 준법(皴法)과 시점(부감(俯瞰), 앙감(仰瞰), 수지법의 구사를 넘어, 다른 현대적인 실경에 적합한 묘법(描法)과 용필(用筆)로 성어내 필어외(誠於內 筆於外: 마음에 성실함이 있으면 저절로 붓으로 드러난다)를 수미일관(首尾一貫) 실천해왔다.
그는 수묵에 대해서만큼은 우리 스스로 주체적 보급자여야 하며 나아가 커다란 명료성을 획득해가는 운동으로까지 발전시켜 수묵에 담긴 철학과 사유의 잠재력을 재발견하고 재탄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분야의 궤(軌)를 같이 하는 미술인으로써, 치열한 성찰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수묵의 양적감, 질적감을 가감(加減) 없이 보여주면서 수묵의 진지한 연구와 깊이를 가늠하기 좋은 기회이다. 더불어 작가가 지닌 화법과 지금껏 다져온 함축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개념으로의 수묵화의 세계를 확연히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글=허기진(전 향암 미술관 학예연구 실장)>
허기진(전 향암 미술관 학예연구 실장)